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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용택 칼럼] 지대기시(至大期時)의 숨은 뜻
이름
인천하늘고
등록일
2021-06-09


말하기를 어렵게 생각하고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하고 믿을 만하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자신의 말을 지키고, 자신이 쓴 글대로 행동으로 실천하기는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청산유수라도, 그 사람의 삶과 행동에서 향내보다 악취가 진동한다면 그 아름다운 말과 글은 죽은 어휘들의 행진일 뿐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역사를 두려워하고 후손들에게 좀 더 나은 미래를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깨어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다만, 자신의 탐욕을 위해 '척'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 문제다. 정의로운 척, 의로운 척, 애국하는 척, 누구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척 등등 사이비들이 많기에 시민들이 실망한다.

한나라 때 사람 사마천(司馬遷, 기원 전 145~86년)은 평생을 바쳐 <사기(史記)>를 완성했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 형식으로 52만6500자라고 사마천 스스로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모두 합쳐 130권인데 본기(本紀) 12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서(書) 8권, 표(表) 10권 등 다섯 분야로 구성돼 있다. 서양에서 <역사(Historia)>를 펴낸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 전 484~425년)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사마천은 동양에서 '사성(史聖)'이라고 일컫는다. 두 사람 모두 역경과 고난을 뚫고 역사를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마천의 친구 이릉(李陵)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한무제가 크게 분노하자 조정 중신들은 모두 그의 눈치를 보며 이릉의 가족까지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릉의 친구 사마천만이 그를 두둔했다. 사마천은 이 일로 한무제의 노여움을 얻어 옥에 갇히게 됐다.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첫째 주살, 둘째 돈 50만 전, 셋째 궁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중인(中人)에 불과했던 그는 그런 거액을 구할 수 없어 치욕적인 궁형을 선택했다.

훗날 사마천은 친구 임안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태산보다 무겁게 죽기도 하고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죽기도 한다.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역사가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거세를 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사기>를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언과 사마천 개인의 통찰을 승화시킨 발분저서(發憤著書)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 전부터 진시황 탄생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진시황이 자신의 아버지인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성(姓)인 영 씨인가, 아니면 조(趙)나라 거상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인 여 씨냐는 것이다. 장양왕이 왕자 시절 조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 반해 그녀를 맞이한 뒤 진시황을 낳았다. 진시황은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태어나 이름을 정(政)이라 했다. <사기> 「진시황본기」 첫 장에 따르면 진시황은 분명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열전」 85권에는 “여불위의 애첩인 그녀는 스스로 임신한 몸임을 숨긴 채 자초(子楚, 장양왕의 또 다른 이름)와 살다가 만삭이 돼 아들 정(政)을 낳았다. 자초가 조희(趙姬)를 아내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기와 달리 열전에 따르면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 된다.

'사성(史聖)'이라 불리는 사마천이 어째서 앞의 본기와 열전의 내용을 다르게 기술했을까? 원문에는 '희자익유신 지대기시 생자정(姬自匿有身 至大期時 生子政)'으로 돼 있다.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분명 여불위의 아들이란 말이지만, 문제는 '지대기시 생자정(만삭이 되어 12개월 만에 아들 정을 낳았다)'에 있다. <부세장서(傳世藏書)>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따르면 '기(期)'는 열두 달로 해석한다. 우리 <한한사전>에도 기(期)는 1년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희가 임신을 알았을 때가 통상적으로 2개월이 지나서라고 추정한다면, 12~13개월이 지나서 진시황 정이 세상을 본 셈이다.

그렇다면 조희는 자초한테 시집가서 잉태한 것이 분명하다. 조산하는 일은 있어도 4~5개월이나 만산(晩産)하는 일은 신화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이렇게 어렵게 쓴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진시황 하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먼저 떠올린다. 정치 비판을 금하려고 책을 태우고 학자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인 폭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춘추전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자를 통일하고, 일곱 나라로 분열돼 혼란스러운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했으며, 수로(水路)를 만들어 농업입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런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사마천과 동시대를 살았던 한무제(漢武帝, 기원 전 157~87년)는 어떤 사람일까? 한무제는 나라의 우환인 흉노를 서북쪽으로 몰아내고 실크로드의 초석을 닦았으며 로마 제국과 견줄만한 제국을 건설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업적에도 불구, 그는 자신의 지위와 비위를 거스르는 자는 무조건 극형으로 다스렸고 진시황처럼 영생불사를 갈망했으며 감숙성 일대에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누구보다 무서운 폭군이었다. 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한나라는 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기초 위에 성립된 국가이기 때문에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어야만 했다. 이것이 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저술한 <춘추(春秋)> 이후 500년이 지난 뒤 자신이 쓴 <사기>가 결코 <춘추>와 같이 역사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한다는 하늘을 찌르는 의기의 표현이 바로 '지대기시(至大期時)'로 나타난 것이다. 뜻글자인 한자의 묘미를 살려 진실을 밝히고자 한 지혜는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사마천의 이런 지혜 덕분에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 아니라 장양왕(자초)의 아들임이 분명해진 셈이다.

황제의 미움을 산 덕분에 '거세'라는 치욕을 당한 뒤에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암흑 속에서 진실의 빛을 찾아 기록하려던 그 마음이 글 쓰는 자, 말하는 자의 뜻이며 실천이어야 한다.

세월이 극심한 혼돈(混沌)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어도 역사가 지향하는 방향은 있는 법이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감은 모질게 살아도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요, 이렇게 어려울 때 금언(金言)이나 격언(格言) 같은 '지당한 말씀'보다는 상식에 기초해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하다. 그리고 국민은 항시 바보스럽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그 바보 같은 국민이 옳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왔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하늘(국민)의 소리를 바르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슬기를 배웠으면 한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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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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